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미스터리는 수세기 동안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을 매료 시켜왔는데요
이번 포스팅은 진시황을 둘러싼 몇 가지 주요 미스터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통치한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도량형 표준화, 단일 문자 도입, 광범위한 도로 및 운하 네트워크 구축 등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미스터리와 음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진시황릉
아마도 가장 유명한 미스터리는 보물, 궁전의 복제품, 병마용 군대로 가득 찬 지하 궁전으로 여겨지는 진시황의 무덤 위치일 것입니다. 1974년 시안 근처에서 병마용이 발견된 반면, 황제의 무덤 자체는 내용물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대부분 탐험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머큐리 강
고대 문헌에는 진시황의 무덤에 황하와 양쯔강을 상징하는 수은이 흐르는 강이 가득 차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양의 독성 수은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불멸의 비약
전설에 따르면 진시황은 불멸을 추구하는 데 집착했으며 이를 추구하기 위해 수은 영약과 기타 위험한 물질을 섭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49세에 조기 사망한 원인이 수은 중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도서 소각 및 학살
진시황은 많은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생매장하도록 명령하여 수많은 역사 기록을 파괴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일부에서는 생각을 그의 통치하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과 계승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경위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라이벌에 의해 암살되었거나 군사 작전 중에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죽음은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진 왕조는 붕괴되었습니다.
유산과 논란
진시황의 유산은 복잡합니다. 그는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의 가혹한 통치와 권위주의적인 조치는 지속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선구적인 개혁자로 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무자비한 폭군으로 봅니다.
진행 중인 고고학적 발견
고고학 발굴을 통해 진시황의 통치와 그의 무덤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견은 고대 중국과 중국의 첫 번째 황제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기여합니다.
요약하면, 진시황의 미스터리는 그의 무덤, 불멸에 대한 탐구, 논쟁의 여지가 있는 행동, 그리고 그의 죽음에 따른 불가사의한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수세기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상 이 상징적인 인물을 둘러싸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질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속적인 연구와 고고학 작업은 미래에 이러한 미스터리에 대해 더 많은 빛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그외에 다른 진시황의 미스테리들 가설들
지상최대의 호화로운 아방궁을 지어놓고 정작 주인공인 진시황은 재임 대부분 순행으로 총 5차례 달구지 타고서 오랫동안 전국 떠돌이 생활을 하였는데 자신이 정복한 나라를 돌아보기 위해 돌아다녔다라는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한 여름 30도 땡볕더위에 가마 안에서 지내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고 사서에 심심치 않게 행렬이 습격(원한 가진 사람이 많았음. 행렬을 보면서 빡친 이 중 하나가 항우.)을 받기도 하였다 합니다.
-비단찢는 소리, 사람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즐겼다는 소문은 낭설이며 실제로는 궁에 머무르는 동안은 하루종일 나라안의 크고 작은 일을 아랫사람에 맡기지 않고 직접 챙기고 문서결재로 철야도 밥먹듯이한 워크홀릭이었다고 전해지고 역사적으로 폭군의 전매특허인 여색과 음주, 연회에 탐닉했다는 기록이 이상하게도 없습니다.